워킹산행

12. 23 무등산 산행 1.

泰山峻嶺 장비 2018. 12. 24. 11:57

- 산행 일시 장소.

  12. 23. 11:29-15:56 (03:58).

- 산행장소.

  무등산

  전남 화순 소재 너와나 식당 - 장불재- 입석대 - 서석대- 중봉 - 중머리재 - 증심사.

- 산행거리.

  7.50km. 누적거리.

- 기상.

  흐리고 맑음.  C 6 / 11.


  이번달은 이상하게 쉬는날 병원치료, 또 이런 저런일로 산행을 한번도 하지 못하게 된다.

거의 한달 이상을 산행을 못하다 무등산 산행 기회가 생겨 회원들과 사당역에서 07시에 출발하여

산행지인 전남 화순 소재 너와나 식당 앞에 도착 장비를 챙겨 출발을 한다.

출발하자 마자 장불재까지 2km를 계속 올라치는데 오랫만에 하는 산행이라 그런지 엄청 힘이든다.

중간에 허기까지 밀려오니 죽을 맛이다.

카메라를 옆에 매달고 가려니 더 지친다.







지난달 23일 진도 조도 산행후 거의 한달만의 산행이다.

그것도 서민들의 아픔과 애환이 깃들어 있는 무등산,

사람들은 무등산 타잔이란 박흥숙이란 사람을 알까 십수년전 mbc에서 다큐로 방송했던 이제는 말할수 있다에서도 방영되었던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 살다 철거반원 4명을 살해 전국적으로 떠들썩하던 무등산을 산행하러 간다.

당시의 사건은.


광주시로의 인구집중과 도시빈민문제,

  농업의 몰락으로 인한 이농과 산업화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농촌문제를 농촌지역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도시와 산업지역 안에서의 사회문제로 표출된다. 공장의 불빛을 보고 무작정 상경한 농촌의 청장년층과 이농민들은 도시에서 상대적인 과잉인구로, 산업예비군으로 적체되어 저임금노동력의 저수지를 형성하게 되는 이들은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을 더욱 압박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또 도시 외곽지대에 광범위한 빈민층을 형성하게 된 이들 이농민층은 도시빈민들의 문제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시키게 된다. 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던 도시빈민문제와 마찬가지로 전남지역에서도 빈민들의 문제가 1977년 4월 20일 이른바 무당촌사건이라는 극적인 형태로 폭발하였다.

  광주시 운림동 무등산 중턱에 소재하고 있는 무허가 빈민촌, 속칭 무당촌에서 무허가 토담집을 강제로 철거하던 공무원(광주시 동구청 건설과 소속)들이 철거민 청년과 싸움 끝에 철거반원 4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은 참상이 발생한 것이다. 철거반원의 강제 철거를 저지하다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 철거민 청년 박홍숙 (당시 22세, 사건 당시 극적인 참상과 함께 무등산 타잔으로 불리워짐)은 1965년 농촌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생계를 위해 홀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광주시로 이주해 와 살면서 시태 철물상회, 철공소 등에서 일하다가 사건이 나기 5년전 살 곳이 없어 무등산 중턱에 무허가 집을 짓고 정착을 시작한 것이다. 무등산 중턱 덕산골에는 1960년대 초․중반부터 무허가 토담집이 수십군데 들어섰으며 이들은 무당굿을 하러 온 사람들에게 장소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생계를 꾸려갔다. 사건 당사자인 박홍숙도 이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산속에 기거하면서 공부에 몰두하여 중학․고교의 검정고시에 합격하였고 사건 당시에는 사법고시를 준비중이었다.

  이 지역의 철거민들은 1975년부터 시의 철거명령을 받았고 1976년에는 시에서 그곳 주택 중 몇 개를 강제철거하기도 했으나 달리 주거대책이 없었던 철거민들은 제자리에 다시 무허가 토담집을 짓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당시 철거민 박홍숙의 무도실력과 사제총에 의한 살인으로 실제 이상으로 극화되고 세인의 주목을 끌었던 이 사건을 살펴보면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이농민과 도시빈민이 주택문제의 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도시로의 인구집중과 도시빈민층의 형성에 따른 주택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정부는 무허가 건축물 철거만으로 그 문제를 무마시키려 했다. 정부의 그러한 정책을 말단에서 대행하고 있는 무허가 건축물 철거반원들은 따라서 도시빈민들의 원망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철거반원들은 빈민들과 함께 정부의 잘못된 주택정책과 빈민정책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철거반원 대부분은 정부의 5급 정규직원인 반장을 제외하면 일용잡급직으로 하루 평균 1, 2동 철거에 일당 1천3백13원(월급 4만원 정도)을 받는 악조건 속에서 일했다. 당시 사고가 발생했던 무등산 도립공원지역 내부의 철거대상 무허가건물만도 1백여동이나 되었는데 정부는 대책없는 강제철거와 과중한 철거작업을 이들에게 떠맡긴 것이다. 정부의 철거반원과 빈민지대의 무허가 건축주와의 잦은 충돌이나 도시빈민들의 원한은 1970년대 말에는 전국적으로 보평화된 현상이었다.

  철거민 박홍숙은 철거반원들이 또 다시 토담집을 헐고 재건축을 못하도록 불을 지르자 이를 보고 격분하여 철거반원들을 포박, 체포하여 인질을 삼아 시당국과 협상하려던 계획을 가졌으나 철거반원들의 저항과 격투과정에서 급기야는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사망한 철거반원들 중에는 셋방살이의 가난한 임시직 고용인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당시 정부의 주택정책과 빈민정책의 부재와 그로 인한 희생의 제물이 된 서민들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들머리 이정표.

들머리.

들머리 이정표.

장불재를 오르는 동안을 조망도 별로 없고 산죽만 이어져 별다른 사진은 촬영하지 못하고 오르니 장불재에 거의 다왔다.

장불재에서 바라본 입석대 그 되로는 무등산 정상이 보이는데 서석대에서 이어지는 길 같은데 등로가 없는걸 보니 통제 구역으로 보이고

군 시설물도 보인다.

당겨본 서석대.

입석대가 왜 입석대 인지 알겠다.

바위들이 직립으로 서있다.

장불재에 위치한 kbs 송신소,

장불재에서 바라본 광주시내.


장불재 탐방 안내소와 휴게소등 시설물이 보이고

그 뒤로는 우측에 입석대 좌측으로는 서석대가 조망된다.





입석대로 오르며 바라본 장불재

백마 능선이 멋지게 펼쳐져 있다.

입석대 바위들.



입석대의 멋진 바위들.




바위들이 정말 기묘하게 누군가가 일부로 조각해서 세워둔것 같다.


입석대에서 바라본 백마능선.

입석대에 단한그루에 상고대가 약간 맺혀있다.

입석대에서 바라본 장불재 시설물들과 그뒤로 산그리메가 펼쳐져 있다.

미세 먼지로 시계가 별로 좋지 못하다.


서석대 정상에는 많은 산객들이 붐비고 있다.

서석대로 오르는 등로에는 내려오는 산객과 올라가는 산객으로 혼잡스럽다.

풍력 발전기도 보인다.

백마 능선과 산 그리메.


입석대 오름길에는 억새도 장관을 보인다.

가을에는 억새가 멋질것 같다.

장성호도 조망된다.

무등산 정상부와 군 시설물들.


서석대 정상부.

서석대에서 내려본 장불재.


중봉에 위치한 군 시설물 은데 무등산엔 웬 군사 시설물이 이렇게 많나.

서석대 정상에서 한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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